그러나 정부는 제도 시행 이후 6개월의 계도기간을 갖겠다고 밝혔다. 300인 이상인 중소ㆍ중견기업의 경우 대기업과 달리 노동시간 단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유였다. 사법처리 과정에서는 노동시간 위반 사실만 보지 않고, 사업주가 법을 준수하기 위해 조치한 내용도 함께 수사해 처리한다고 했다.
고용노동부는 계도기간 중 사업장 감독이나 진정사건 제기로 노동시간 위반이 확인돼도 시정기간을 부여하겠다고 밝혔다. 시정기간은 3개월이었다. 필요하면 3개월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최장 6개월의 시정기간을 부여한 것이다.
이는 근로감독관이 부여하는 시정기한보다 긴 기간이었다. 당시 근로감독관 집무규정은 노동시간 위반 사실이 적발됐을 경우 7일의 시정기한을 부여한다고 규정했다. 기한 안에 시정하지 못하면 감독관은 수사에 착수해야 했다. 지난 8월 개정된 근로감독관 집무규정에서는 이 기한이 14일로 늘었다. 그렇다 해도 계도기간을 통해 주어진 시정기간보다는 짧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18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주52시간제 관련 입법이 불발될 경우 추진할 보완대책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계도기간, 노동시간 위반 처벌 유예?
정부는 현장 혼란을 막기 위해 계도기간을 부여했지만, 경영계는 우려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권태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은 주52시간제 시행 다음날 "(계도기간 6개월이) 근본적인 해결방안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경영계가 우려했던 이유는 계도기간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노동시간 위반이 확인되면 시정기간을 부여해 개선을 유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행정적 처분일 뿐이다. 만약 노동시간 위반 사건이 고소ㆍ고발을 통해 제기된다면 얘기가 다르다. 고소ㆍ고발이 제기될 경우 노동청은 검사 지휘에 따라 수사를 진행하게 된다. 정부의 행정절차가 아닌 사법절차에 따라 사건이 처리되는 것이다.
경영계가 계도기간을 '면죄부'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동시간 위반 사건이 사법절차를 거치게 되면 처벌을 피할 수는 없다. 즉, 노동청 단속 등 행정적 처분이 유예될 뿐 사법절차에 따른 처벌이 유예되는 건 아니었다. 이 때문에 경영계에서는 계도기간이 큰 의미가 없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같은 해 10월 전국 기관장 회의에서 "현장에서 '계도기간'을 '적용유예'로 인식하지 않도록 각별히 관심을 갖고 지도해달라"며 "충분한 시정기회는 부여하되, 고의적으로 개선을 해태하는 사업주에 대해서는 엄정 조치해 줄 것을 당부한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는 같은 해 12월 계도기간을 3개월 연장한다고 발표하면서 교통정리에 나섰다. 고용노동부는 "근로시간 위반으로 고소ㆍ고발이 제기된 경우 사업장 감독이나 진정사건과 달리 형사사건으로서 수사 후 사건을 검찰에 송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수사과정에서 사업주가 근로시간 준수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법을 준수할 수 없었던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는지 여부 등 제반 사정을 면밀히 수사해 검찰과 협의해 사건을 송치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검찰은 우리부(고용노동부)가 송치한 사건의 수사 결과를 토대로 법 위반의 고의 여부, 책임성 조각사유 등을 충분히 살펴 기소 여부를 결정한다"고 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19일 계도기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설명했다. 이재갑 장관은 전날(18일) 탄력근로제 확대 법안이 불발되면 2020년부터 주52시간제가 적용되는 50~299인 사업장에 대해 충분한 계도기간을 부여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다수 언론이 정부가 50~299인 사업장의 노동시간 위반 처벌을 유예할 방침이라고 보도하자 고용노동부가 진화에 나선 것이다.
고용노동부는 "계도기간의 의미는 장시간 근로감독 대상에서 제외하고 근로자 진정 등을 통해 위반사항 적발 시 충분한 시정기간을 부여하는 것"이라며 "주52시간제의 연기나 법의 미집행, 처벌 유예 또는 면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또 "근로자 진정 등으로 위반사항이 적발되고, 시정기간 내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 근로자 고소ㆍ고발 시에는 고의성 여부 등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8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관계장관회의(녹실회의)를 열고 50~299인 사업장의 주52시간제 적용에 관한 보완대책을 논의했다. 사진은 홍 부총리가 지난 13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경제활력대책회의 모두발언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고용부ㆍ검찰, 사실상 '처벌 유예' 협의
설명이 장황하면 핵심이 흐려진다. 이번 고용노동부 발표에 대해서도 애매모호하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고용노동부 설명을 종합하면 계도기간을 통해 노동시간 위반을 시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지만 처벌을 유예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말이 꼬인다. 전문가들은 계도기간이 사실상 노동시간 위반에 대한 처벌 유예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박귀천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부가 어쨌든 '계도기간'이라는 말을 썼다면 그 기간에는 처벌을 안 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게 맞다"며 "계도기간이라는 말이 나온 것 자체가 근로감독관이 조사를 하더라도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하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추측된다"고 했다.
정지원 법무법인 율촌 상임고문은 "계도기간 내에 위반 사실이 발견됐을 때, 처벌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는 조금 불명확하다"며 "계도기간과 처벌 유예가 같은 의미가 아니라고 한다면 계도기간이 무슨 의미인지 나도 물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계도기간 설정이 정부 차원의 결정이기 때문에 검찰도 노동시간 위반으로 기소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계도기간은 노동부만의 결정이 아니고 정부 차원의 결정"이라며 "검찰도 정부 기관으로 봐야 할 텐데 그렇다면 근로시간 위반을 '처벌하지 않겠다', '수사나 기소하지 않겠다'는 게 정부 의사"라고 해석했다.
박지순 교수는 "적어도 (노동시간 위반에 대한) 형사사건에서는 노동부 1차 수사가 유예되는 것이고, 수사 주체가 스스로 수사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라며 "검찰에 직접 고발되더라도 검찰 역시 정부기관이기 때문에 정부의 일관된 방침에 따라 수사가 이뤄지지 않을 것이고 기소도 안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 정부도 처벌 유예 효과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고용노동부 관계자의 설명은 이렇다. 고용노동부와 검찰은 이미 노동시간 위반 처벌과 관련한 사전 협의를 마쳤다. 당시 협의 과정에서 노동시간 위반 사업장을 바로 처벌하기보다 개선 노력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 의견을 같이 했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아직 근로시간 단축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다 보니 근로시간 위반이 있을 때마다 즉시 처벌하기보다는 자체적으로 개선할 수 있도록 계도기간을 부여하고, 그래도 개선이 안 된 경우에는 처벌하는 식으로 운영했으면 한다는 내용을 협의한 것"이라며 "어느 정도 큰 틀에서는 (검찰과) 의견을 같이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권영국 정의당 노동인권안전특별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주52시간제 보완대책에 대한 법적 대응을 경고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계도기간 부여, 법적 근거 '부실' 지적 잇따라
계도기간이 사실상 적용 유예 내지 처벌 유예로 해석되자, 전선이 확대됐다. 정의당 노동인권안전특별위원회는 지난 20일 계도기간 부여가 "법령상 권한 없는 자의 권한 남용"이라면서 직권남용으로 고발 조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노동인권안전특위는 "(주52시간제를 골자로 한 개정 근로기준법은) 법 시행 이후 계도기간을 부여하거나 위반 시 처벌을 유예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을 두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계도기간이란 어떤 정책을 시행하기에 앞서 사람들에게 이를 알리고 일깨워주는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법의 적용을 유예하는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부가 법 시행 이후 법의 적용을 유예하는 것은 스스로 직권을 남용하거나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부가 입법권을 침해하고 삼권분립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이어졌다. 노동인권안전특위는 "정부는 지난해 7월부터 12월까지 1차 유예, 이듬해 3월까지 2차 유예기간을 부여해 300명 이상 사업장이 법률 규정과 달리 시행일을 9개월 미루도록 했다"며 "이는 법률상 근거 없이 행정부가 권한을 남용해 개정 법률의 시행을 막고 국회 입법권한을 침해하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신인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법률원장(변호사)은 "법에 분명히 명시적인 시행일이 있고, 내년부터 50~299인 사업장도 적용되는 것"이라며 "법을 위반하면 형사처벌을 받야야 하는데 노동부나 정부가 임의로 형사처벌을 안 하겠다고 하는 것 자체로 직권남용이고 삼권분립 위반"이라고 말했다.
신인수 원장은 "검찰이 정부가 부여한 계도기간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하는 것도 검찰의 권한 남용"이라며 "법무부든, 노동부든, 국무총리든, 대통령이든 (노동시간 위반에 대해) 형사처벌하지 않겠다는 지침을 내리는 순간 직권남용"이라고 했다.
학계 의견도 다르지 않았다. 박귀천 교수는 "법이 시행되는데 정부가 처벌하지 않는 건 노골적으로 말하면 입법부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국회에서 법률이 통과됐는데 행정적으로 처벌을 유예하는 게 맞는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그는 "법률이 있는 상황에서 계도기간이라는 이유로 명백한 법 위반 사항이 나왔는데도 처벌하지 않는다면 법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지순 교수는 "입법부가 제정한 법이 시행됐음에도 불구하고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가 지키지 않고, 또 지키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라며 "입법부 의사를 행정부가 무시하는 건 있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계도기간이라는 건 법률에 근거하지 않고서는 법적 근거가 없다고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박지순 교수는 계도기간이 "법리적으로 매우 불명확한 방식"이라면서도 "다른 수단이 없는 한 정부가 정치적인 선택을 한 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 전경(사진=뉴시스)
#고의성 여부로 선별 기소, 계도기간 취지와 안 맞아
사업주가 노동시간을 고의로 위반했는지, 책임을 묻지 않을 만한 사유가 있는지 살펴보고 기소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정부 입장도 도마 위에 올랐다.
정지원 상임고문은 "구체적인 수치는 확인해봐야겠지만 그동안 근로시간 위반에 대한 진정이나 고소 사건은 극히 적었다"며 "노동법 위반, 특히 근로시간 위반 사실에 대해서는 위반 내용이 분명하기 때문에 '책임성이 없다'는 내용으로 불기소한 적이 잘 없다"고 전했다.
반면, 한 근로감독관은 "임금체불은 거의 고의성을 따지지 않지만 부당노동행위 같은 경우에는 고의성을 판단한다"며 "장시간 근로 역시 위반했지만 개선하려는 노력이나 노조와 단체협약을 체결해 해결하려는 등의 노력을 한 경우라면 아마 불기소할 수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상 처벌 유예로 인식되는 계도기간 특성을 감안하면 선별적 기소가 또다른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도 있다. 박지순 교수는 "일정 기간 동안 일정한 사유 하에서 기소하지 않겠다,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52시간을 안 지켜도 된다는 신호를 이미 줬는데 사유가 있는지 없는지 따져서 선별적으로 송치한다는 것도 난센스"라고 지적했다.
Posted by 김대영 기자 (월간 노동법률)
